흔히 마음공부라고 부르는 마이너한 길을 혼자 탐색하다 보면 누구나 혼돈을 겪게 됩니다. 이 혼돈에 대해 얘기하라면 몇 날 며칠이라도 떠들 자신이 있지만, 어쩐지 글을 쓸 때는 혼란을 거쳐 도달한 결론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쓰게 되더라고요. 마치 처음부터 헷갈리는 건 없었던 것처럼, 혼란에 대해서는 글로 적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저는 누군가의 혼란을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 자기가 헤매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유해주기를 바랐었죠. 결론지어진 얘기들만 보다 보면 내 혼란이 여기 있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겪었던 혼란과 혼란기를 거쳐 도달한 결론과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혼란에 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2017년 즈음, 저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를 아주 열심히 묻고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깨우쳐줄 책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으면서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작은 자아를 넘어서 진짜 내가 무엇인지를 보려고 애썼어요. 그러면서 조금 놀랍고 신선한, 또 신비한 체험을 여러 번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이런 연습을 멈추게 만든 경험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내가 진짜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붙잡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씩 제거해나가는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이 몸도 아니고 이 생각도 아니고 이 감정도 아니고, 이 정체감도 아니고….’ 그러다 정말 어느 순간에 내 정체감을 느낄 수 없는, 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어요. 그대로 두면 이 작은 나의 정체감이 이대로 소멸될 수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렇게 에고가 죽기 위해서 매일매일 정진해왔는데도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이 작은 나는 필사적으로 죽지 않으려고 하더라구요.
‘아니, 이 내가 잘 살고 싶어서, 이 내가 행복해지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이 내가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이거 아니야, 난 이러려던 게 아냐!!" 하면서 스스로 애써 찾은 문 앞에서 필사적으로 돌아 나왔어요. 그때의 허탈감이란…. 그리고 몇 년 후 저는 사랑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5년 정도 사랑작업을 하면서 저는 우리가 무의식정화 혹은 내면아이 치유라고 부르는 이 자기사랑의 과정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경계를 계속해서 확장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의 본성, 본체는 ‘알아차림’, ‘순수의식’ 그 자체라고 하죠. 무한한 의식이 유한한 정체감과 자기를 동일시하며 이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는 게 영성 가르침의 핵심이에요. 과거 많은 노력을 하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를 물으며 몸을 경계로 하는 분리된 자아의 정체감에서 벗어나더라도, 이 작은 자아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상처와 그 상처가 만들어내는 욕망이 엄청난 중력으로 다시 의식을 자기에게 집중시킨다는 것이었어요.
작은 자아는 오직 ‘나, 나의 삶, 나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어요. 결핍이 만들어내는 중력은 너무나 강해서 확장된 의식을 순식간에 자기에게로 불러들이죠. 마치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나면 온통 무릎으로 신경이 쏠리고 “나=무릎”인 상태가 되는 것처럼요. 내면의 아픔은 ‘상처받은 내면아이’라고 인격화해서 불릴 정도로 하나의 독립된 자아처럼 만들어져서 우리의 내면에 여러 개의 자아로 분열된 상태로 살고 있고, 본래의 나를 대신해서 ‘나’의 역할을 자기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이 분열된 자아들이 통합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본래의 나를 가리는 자아들, 이 상처받은 내면아이들을 원래의 에너지로 돌려보내서 거짓을 믿고 있는 신념들이 해체되고, 내면아이는 사라지는 이 무의식정화 과정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선 심리학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건강한 자아감을 회복할 수 있어요. 보통 심리학은 이 몸을 경계로 하는 인격체를 한 인간으로 보고 인간으로서 건강한 자아감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하니까요. 심리학은 과학이기 때문에 거기까지를 목표로 하지만 마음공부, 영성은 이 경계를 넘어서 진정한 자기를 찾고자 하죠(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얘기이고 칼 융의 심리학 같은 경우는 이 경계를 훌쩍 넘어가요).
사랑작업은 우선 내면의 분열된 자아들, 상처받은 내면아이들을 치유하고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건강한 자아감을 회복하게 해요.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본래의 나로 돌아갈 때까지, 좁혀진 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 경계를 넘어서게 하는 과정이 반복돼요.
예전에는 “나는 00해서 버림받았다”라고 생각하면 이 ‘버림받음’에서 아픔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 아픔을 판단 없이 수용하다 보면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내면아이는 사라지고, 감정은 감정으로 돌아가고 신념도 사라졌어요.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나는 00해서 버림받았다”라고 느끼기도 전에 “나는”이라고 할 때 벌써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어요.
내가 어떤 경계를 가지고 ‘나’라고 생각을 일으킨 순간 이미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한 감정으로 아픔이 신호를 보내요. 처음 그걸 느꼈을 때, 아픔이 느껴져서 눈물이 쏟아지면서도 “와… 드디어…” 하는 기쁨이 있었는데요. 일생을 매일, 매 순간을 이 조그만 나에 관한 관심에 묶여서 ‘내’가 사랑받으려면 어째야 하는지, ‘내’가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살면 좋을지, ‘내’가 인생을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 ‘내가, 내가, 내가…’ 하는 그것이 고통이었다는 게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거든요.
아픈 줄도 모르고 온통 ‘나’라는 관심에 함몰된 채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어요. 그리고 이게 고통의 뿌리였다는 걸 알았어요. 결국 이 몸을 경계로 하는 작은 나를 ‘나’라고 알고 살아서는 자유로울 수도 충만할 수도 없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픔을 싫어하고 보지 않으려고 해요. 하지만 아픔은 항상 내 안에 새겨진 진실을 보라는 신호예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드러날 때 아픔이 그걸 알려줘요. “넌 너를 오해하고 있어. 넌 너를 잘못 알고 있어!” 아픔은 그 오해의 자리에서 정확히 신호를 보내줘요.
아픔이 나를 구해줄 신호인 줄 모르고 살 때 우리는 이 아픔을 안 느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해요. 저항하면서 못 느끼게 만들어놓고 바깥만 보고 사는 거예요. 삶이 일을 일으켜서 “너 여기가 이렇게 아프잖니!” 하고 건드려줄 때까지 아픈 줄 모르고, 무감각을 행복이라 여기고 사는 거예요. 아픔을 못 느끼는 게 좋은 게 아닌데, 아픔의 신호를 따라가서 거짓이라는 가시를 빼내야 진짜 나로 살 수 있는 건데, 에고의 세상은 완전히 반대로 가요.
그래서 사랑작업을 꽤 오래 해오신 분들은 우스갯소리로 자기를 ‘아픔 성애자’라고 부르기도 해요. 내가 만들어놓은 좁은 감옥의 벽이 드디어 발견되고 만져지는 거니까요. 여기가 아프구나! 내가 벽을 세워둔 곳이 여기였구나! 답답함, 불편함, 혼돈을 동반하는 이 아픔의 감각들이 피하고 거부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을 기억하고 알려주는 고마운 신호라는 걸 알면 사랑작업의 과정이 훨씬 쉬워져요.
지난봄에는 계속해서 이 작은 나를 붙잡고 있는 뿌리 깊은 상처를 들여다봤어요. 항상 이렇게 아픔이 발견되고 그걸 보는 과정에는 충격과 혼란과 답답함이 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 수용이 되면 감옥에서 벗어나요. 그러면 몰랐던 자유와 기쁨, 평화가 와요. 그러면 그 평화의 시기를 신나게 살아요. 그러다가 또 충격과 혼란의 시기가 와요. 이런 과정을 간단히 ‘성장’이라 하는 거겠죠. 이 과정이 한 시간인 경우도 있고 하루, 이틀, 일주일인 경우도 있는데 어떨 때는 몇 달씩 긴 혼란기가 오기도 해요.
혼란스럽다는 것은 지금껏 내가 만들어놓은 나라는 테두리에서 안주하기를 멈추고 다시 이 작은 세계의 경계면에 닿았다는 뜻이에요. 경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혼란을 거쳐 가요. 새로운 세계의 입구는 항상 혼란이라는 두터운 장막으로 덮여있거든요.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경계에 있는 사람은 방황하지만 바로 그 다음 장면에는 자유와 기쁨이 있어요. 그리고 ‘내가 한다’고 착각하는 작은 자아를 ‘바라보는’ 그 자체가 자기일 수 있는 가능성에 가슴이 열립니다. ‘의식’ 그 자체가 나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요.
저는 아직 여기 어디쯤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상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어요. 그저 주어지는 대로 아픔을 만나면서 내가 ‘나’라고 경계 지어놓은 자리에서 근원의 사랑을 만나고 거기서 이 경계를 허물어 나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