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을 너무 많이 섭취해서 기분이 많이 다운되고 불안해진 어느 날이었다. 마침 그날 남자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애정 가득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집 안으로 함께 들어왔다. 그런 뒤 화장실을 들어가는데,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마구 올라왔다.
‘넌 사랑스럽지 않아. 아무도 널 사랑해주지 않을 거야.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말이야. 누가 너 따위를 사랑해주겠니?’
애인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해서 사랑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런 나의 노력은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든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소리니까. 그렇지만 나를 끔찍이도 사랑해주는 남자친구가 생긴 지금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기분이 스토커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이렇게 말하자 남자친구는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해주고 있잖아!” 하고 위로해줬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내 안의 무언가는 ‘아니야! 난 자격 없어!’ 하고 외치고 있었다. 남이 아무리 그런 확인을 해줘봤자 내 마음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나는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내어 이 마음을 봐주기로 했다.
레이키 힐러기도 한 나는 머리에 손을 올리고 ‘어둡고 아픈 내 이런 생각에 빛을 비춰주겠습니다. 그 생각에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하고 의도를 냈다. 그리고 근원의 빛, 사랑이 내 머리로 흘러들어 그 아픈 생각을 꼭 껴안아준다고 심상화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문장이 떠오름과 동시에 발작적인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반가워, 잘 왔어! 환영해!”
한바탕 울고 난 뒤 찬찬히 생각해봤다. 뭘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는 환영을 받고 싶었던 걸까? 그러자 갑자기 떠오르는 것들이 또 있었다. 나는 셋째 딸로 태어났다. 듣기로는 계획에 없던 아이였다고 한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주변 친척들은 외벌이 공무원 월급으로 애를 어떻게 셋이나 키울 거냐며 나를 지우라고 했었다.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기에 아마 엄마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추측건대, 태중에서부터 느꼈을 ‘나는 존재하면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었다. 조금 어이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가끔은 거울을 보며 양치를 할 때도 ‘네가 뭔데 양치를 해?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 하는 생각이 들고 밥을 먹을 때도 ‘네가 뭔데 밥을 축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행동에 그런 생각이 다 따라붙었다. 머릿속의 그런 생각들은 한결같이 ‘너는 존재하면 안 돼’로 수렴되었다.
그제야 왜 깊은 마음속에서 “반가워, 잘 왔어! 환영해!”라는 말이 나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 생겨났을 때부터 100%의 환영까지는 받지 못한 아이였기에 무의식 깊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저 말이었다. 하지만 이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랑받고 싶다고, 존재하고 싶다고 나를 찾아온 그 아이를 면박하거나 외면하기만 했다. 너만 없으면 내 인생은 행복할 거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세상에게 환영받지 못한 아이를 나 역시도 환영해주지 않은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반갑다고, 잘 왔다고, 너를 환영한다는 말을 들어본 그 아이는 그렇게 하여 서럽게 울었다. 그 환영의 말은 내 외부, 즉 세상이나 가족 혹은 엄마에게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 아이가 그들에게서 거절당하고 외면당했을 때 마지막 희망으로 찾아온 것이 나였으니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나라는 문을 두드리면서 “나,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았었는데 너라도 나를 환영해줄 수 있을까…?” 하고 먼저 다가와 물어봐주었으니까. 모든 내면아이는 ‘느낌’을 통해 나라는 문을 두드린다. 그 문을 활짝 열어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해줄지, 아니면 문전박대하며 내쫓을지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