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바다가 보이는 동네 카페 야외 의자에 앉아 있다. 제주에 살면 참 좋은 게 문을 열면 제주도가 있다는 것. 카페의 너른 마당 한편에 노란 유채꽃밭이 있다. 좋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유채꽃도, 알싸한 꽃냄새도, 그 사이를 노니는 벌과 흰나비도, 기분 좋게 부는 바람도, 따뜻한 봄볕도. 참 좋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의 윤슬도, 잔잔한 파도 소리도, 저 멀리 보이는 박수기정도, 봄 풍경 속에서 설레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달뜬 분위기도. 예쁘다. 벌의 무게에 살짝 처졌다가 다시 살랑 솟는 유채꽃의 움직임도, 거미줄에 걸려 뱅글뱅글 흔들거리는 마른 꽃잎도. 모든 게 참 좋다. 이대로 다 좋다. 그냥 좋다. 자연이, 이 봄이, 이 풍경이 좋은 것처럼 나도 그냥 좋다.
내가 나를 좋아하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나를 아끼고,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속으로는 나를 참 많이 미워하고, 원망하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걸 명상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말은 쉽지만, 오늘이 오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의 어떤 일들과 특정한 마음과 느낌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심지어는 이 존재가 시작됐던 맨 처음의 마음까지도. 나는 정말 마음껏 사랑을 주고받고, 살려고 이 지구별에 왔는데 웬걸, 시작이 그렇지 못했다. 막상 태어나보니 이 캐릭터는 사랑받을 수 있는 신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은 남자인 아들을 원했는데, 나의 성별은 여자인 딸. 몸이 약한 엄마는 어떻게든 아들을 낳으려고 했는데, 첫째인 딸을 낳는 도중에 잃었고, 둘째 딸은 가까스로 낳았으며, 셋째 아기도 낳다가 죽었는데, 낳고 보니 아들이었다. 약한 몸이지만, 이번엔 기필코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 하나로 넷째 아이를 임신했고, 하필 그게 나였다.
나는 배 속에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내가 꼭 엄마가 원하는 아들 돼줄게. 내가 아들 돼서 우리 엄마 아빠 행복하게 해줄게. 나만 믿어.” 그런데 아뿔싸, 시간이 흐르자 내 몸에 뭔가가 생성됐는데, 그것이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몹시 두려웠다. 이게 엄마가 원하는 것인지 나가서 보여주기 전까진 알 수 없지만, 엄마가 아들을 원하면 원할수록 왠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이대로 나가도 되나. 나는 이미 이렇게 만들어졌는데, 엄마가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산달이 된 10개월째 내 몸은 서서히 움직이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나는 아직 나갈 준비가 안 됐는데, 내 몸은 마치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은 새 제품처럼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나는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성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가지 않으려고 출구에서 악착같이 버텼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남자일 거라 확신하며 나를 꺼내려 했고, 나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끝의 끝까지 버텼다. 그러다 엄마와 아기 둘 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억지로 잡아 뺐고, 그 과정에 내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뜯겨져 나갔다. 밖으로 몸 전부가 나오고, 내 생식기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린 공기를 기억한다.
나는 내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도 원치 않는 괴물로 느껴졌다. 의사는 인큐베이터에 머리 가죽이 벗겨진 아기를 넣었고, 나는 그곳이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쓸모없고, 필요 없는 존재라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기서 그대로 죽기로 결심했는데, 의사가 ‘저대로는 죽을 것 같다. 아기에게 엄마 젖을 물렸을 때 스스로 빨면 살 것이고, 안 빨면 죽을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내 입에 젖꼭지를 갖다 댔고, 나는 달큰한 젖 향기에 그만 정신을 놓고, 그것을 꽉 물고 쭈욱쭉 빨아버렸다. 나의 삶은 그렇게 어물쩍 시작됐다. 시작이 이러했기에 나는 숫기 없고, 확신이 없고, 소극적인 반면에 먹성은 엄청나고, 걸핏하면 두렵고, 불안하고, 툭하면 죽고픈 마음이 수시로 올라왔다. 잘하려고, 잘 보이려고, 눈치를 보고, 애를 쓰면서 살아왔다. 쓸모없거나 필요 없는 아이가 되면 쫓겨날까 봐 무섭고, 불안하고, 두려웠다.
게다가 엄마 아빠는 사이가 몹시 안 좋았는데, 술에 취한 아빠가 엄마를 자주 때렸다. 폭력은 언니와 나에게까지 번졌다. 한번은 아기인 내가 큰 소리로 울자 아빠는 그대로 내 몸을 들어 재래식 부엌의 낮은 바닥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그만큼 나는 소중한 아기도, 딸도 아니었고, 소중한 여자도, 자식도 아니었다. 나의 부모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었으나 소중한 아이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나는 마음껏 사랑하며 살려고 지구별에 왔는데, 초장이 좀 어려웠던 것이다. 그 과정에 나를 지키려고 수많은 보호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초반에 입력된 프로그램을 따라 살고 있었다. 사실 이번 생에만 입력된 프로그램은 아니고, 여러 생을 거치며 인간의 몸으로 살면서 생긴 인류 프로그램과 인간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생긴 사회화 프로그램 등 여러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그저 입력된 프로그래밍대로 살고 있는 로봇과 다름없었다.
‘나’로 마음껏 자유롭게 살려고 왔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억울했다. 과연 진짜 나는 누구인가. 본래의 순수한 나로 순수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수많은 프로그램에서 깨어나려고 계속 명상을 했다. 돈도 딱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벌고 깨어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나에게는 그게 더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었다.
눈을 감고 명상하면서 계속 나를 바라봤다. 눈을 뜨고 명상하면서 계속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계속 바라보다가 일상 속에서 마음에 불순물이 올라오면 닦아내고, 닦아내고 하다 보니 어느새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분하는 눈이 생겼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두고, 해로운 프로그램은 점차 지워나간다. 그 전에는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잘 안 되던 것들이 탁 알아버리면 곧장 바뀐다. 사람이 바뀐다. 계속 업데이트와 리셋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대상과 그 대상을 담고 있는 공간.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공간.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전체 공간. 지금 우리를 담고 있는 이 공간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공간. 나의 몸과 마음, 느낌, 생각, 감각, 에너지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공간.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전체 공간이 나였다. 대상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공간.
그리고 이 공간은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담고 있다. 우리는 이 공간을 ‘지금 이 순간’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지금 있는 이곳도, 내 옆에 있는 유채꽃과 꽃향기도, 동네 카페도, 한국 나라도, 저 멀리 오스트레일리아도, 태평양도, 그 위를 나는 철새도, 남극의 펭귄도 모두 이곳에 담겨 있다. 이 지구와 달, 별, 은하계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모두 ‘지금 이 순간’에 담겨 있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공간은 무한하고, 광활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라져도 이 공간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잠시 이 순간에 올라탄 여행자들이다. 이 순간이라는 무대에서 열연 중인 ‘삶’의 배우들이다. 지금은 이 순간에 함께 있지만, 때가 되면 언젠가 여기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우리에게서 삶이 사라지면, 이 몸은 더는 움직이지 않는 고체가 됐다가 점차 여러 요소로 분리되고, 결국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 다시 몸은 지구의 한 요소로 돌아가고 나를 이루고 있는 의식은 원래의 공간인 허공, 빈 허공이라는 공간으로 돌아간다.
지금 우리를 하나로 결합하고 있는 것은 ‘생명’, 바로 이 생동해 있는 생명이다. 이 귀한 생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한 공간에 있음과 동시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공간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내 집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다 각자 자기만의 건물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건물의 건물주는 생명. 생명이 사라지면 이 건물도 사라진다.
이 건물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이 건물이 언제 스러질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라는 건물에서 살 수 있는 기회는 지금 한 번뿐이라는 것. 내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날지, 안 태어날지, 나무로 태어날지, 벌레로 태어날지, 고양이로 태어날지, 알렉스로 태어날지, 줄리아로 태어날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나’로, ‘나비연’으로 살 수 있는 건 지금 이 생 한 번뿐이라는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변화가 시작됐다.
나와 사이가 안 좋다가도 ‘아 맞다. 이럴 시간이 없지’ 하고 이내 정신을 차리게 된다. 오래도록 반복돼온 강력한 프로그래밍을 벗어나는 건 힘든 일이지만, 점차 빨리 깨어나고 있다. 나로 살 수 있는 건 이번 한 번뿐이고, 이 삶이 너무 소중하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나눌 건 사랑밖에 없다. 그래서 ‘나’와 또 다른 ‘나’들과 기꺼이 사랑하며 살려고 한다.
다행히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후, 삶은 아직까지 나에게 젖을 물려주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 모르니 이 순간을 충분히 만끽하며 ‘나’로 순수하게 살아보려 한다. 앞으로 ‘나’라는 공간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 모른다. 그래서 불안하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그래서 기대되고 설렌다. 이 삶이 ‘나’를 통해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부디,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나’가 마음껏 사랑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