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 소음 때문에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요.”
내담자들의 질린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익숙해서 옅은 미소마저 흘러나온다. 예전의 나도 저런 표정이었겠지. ‘층간 소음’이라는 단어는 고통받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자기 수용으로 무의식이 정화되기 전, 고통의 쳇바퀴를 열심히 굴려댔던 과거 말이다.
나는 유난히 ‘소음’에 예민했다. 내가 참을 수 있는 수준은 짹짹거리는 새소리나 가끔 윙윙거리는 냉장고 소리 정도. 가장 편안해야 하는 공간인 집에서 쿵쿵쿵 걷고 뛰는 소리, 대문을 쾅! 닫는 소리 같은 층간 소음은 나를 제정신으로 살 수 없게 만들었다. 위층에 올라가 따지기도 하고 간식을 바치며 부탁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래서 난 이사를 할 때마다,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평일 낮과 밤, 주말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일주일 이상 그 동네를 찾아갔다. 허락을 구하고 그 집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물러보기도 했다. 실례인 걸 알지만 내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시끄러운 곳인지 아닌지 꼭 알아야 했기에. 그 정도로 소음이 내게 주는 고통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고르고 골라서 계약을 하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층간 소음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수도 공사를 하거나 같은 건물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거나 시간대와 상관없이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식이었다. ‘얼마나 공들여서 고른 집인데, 이따위로 날 뒤통수친다고?’ 형체 없는 무언가를 해치고 싶은 충동, 소리를 내는 모든 존재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네가 원하는 평화 따위 내가 줄 리 없겠지?’ 날 내려다보는 어떤 존재가 있으면 마치 이렇게 비꼬고 있을 것 같았다. 이사를 할 때마다 이러니 정말 참담했다. 숟가락 살인마처럼, 소음 살인마가 날 계속 쫓아다니는 기분이랄까.
그럼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더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간 것도, 그냥 좋게좋게 넘기기를 택한 것도 아니었다. 층간 소음 때문에 올라오는 내 감정을 똑바로 직면했다. 현실은 언제나 가치 중립적인 ‘거울 역할’을 할 뿐이다. 층간 소음을 겪으며 올라오는 내 감정으로 인해 괴롭다면, 내 안에 풀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니까.
“진짜 짜증 나…. 제발 조용히 해. 너무 고통스러워….” 층간 소음으로 인해 올라오는 솔직한 감정을 마주하며 입으로도 뱉어보고 글로도 써보고 눈을 감고 몸의 감각에도 집중하여 내 불편함을 한껏 끌어안기를 몇 주. 가장 겉에 드러난 화와 짜증으로 둔갑했던 진짜 내 마음이 올라왔다. “나 무시하지 마, 나 공격하지 마.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 소리 내지 마! 날 들키기 싫어!” 무슨 뜻일까…. 나조차도 해석이 필요한 마음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내면에 억눌린 감정들을 찾아내어 수용하는 ‘자기 수용’을 거듭해서 하다 보면 묻혀 있던 ‘기억‘과 이해하는 데 소요될 시간 같은 건 아예 무시된 채로 갑자기 쏟아지는 ‘앎’이 찾아온다. 이 마음을 가만히 받아들이며 내가 자각한 것은, ‘내 첫 장소는 자궁’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는 동안 모든 것을 인식할 때는 자신의 첫 기억을 투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모든 남자에게는 아빠를, 여자에게는 엄마를 투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장소를 인식할 때는 내 육체가 처음 존재했던 장소인 ‘자궁’에 대한 기억을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시작은 엄마의 혼전 임신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갑작스러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너무나도 어린 엄마와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한 친할머니. 이런 상황에서 뱃속의 태아 상태로 있던 나는 내 존재를 부정당하는 온갖 말들을 들어야 했고, 부모님의 무의식은 곧바로 내게 흡수되었다. ‘내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아. 난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야. 난 엄마를 힘들게 하는 존재야. 난 세상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
그러니까 나는 층간 소음을 단순히 어떠한 ‘소리’가 아닌, 내 존재를 거부당하는, 난 환영 받지 못한 존재라는 아픔을 자극하는 소리라 여겨 두렵고 불안했던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마음, 그 아픔들을 한껏 끌어안고 난 이후(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달쯤?), 서서히 층간 소음에 별 반응 없는 나를 자각하게 되었다. 구름을 보며 그냥 ‘구름’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그저 ‘소리가 나네?’ 정도일 뿐, 분노도 두려움도 올라오지 않았다. 내 불안을 보여줄 현실 거울이 필요 없어지니 층간 소음이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불안을 끌어안았으니 층간 소음이 들려도 거슬리지 않게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층간 소음으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된 현실을 맞이한 것이다.
치유 작업을 할 때는 층간 소음이 자극하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관건이다.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유난이다’라는 식이 아닌, ‘그럴만하다. 이유 없는 감정은 없다. 마땅히 이렇게 느낄만하다. 고통받느라 힘들었겠다.’ 이런 태도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억눌러져 있던 마음을 직면하는 것이다.
너무 싫어! 듣기 싫어! 날 자극하지 마! 시끄러워! 사람 무시해?
너무 불안하고 두려워. 공격받는 것 같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화나!
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 같아서 비참해.
이런 식으로 시작하여 사랑받고 싶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불안하고 두렵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비참하다, 내 존재가 부정당한 거 같아서 아프다 등 깊은 아픔으로 도착하여 가만히 머물러주는 것이다. 글로 써도 좋고 입으로 뱉어도 좋고 눈 감고 가만히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아도 좋다. 나는 글쟁이로 살기에 글로 풀어쓰는 방법과 김상운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거울 명상도 추천한다.
그 감정을 충분히 해소하되, 그 감정을 뱉는 나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는 눈도 함께 뜨고 있는 상태로 균형을 맞춰주며 수많은 자신을 끌어안아주면 된다. 내가 수용하지 못했던 수많은 ‘나’를 수용하게 되면 현실이라는 거울은 내가 무엇을 수용하고 있지 않은지 보여줄 필요가 없어진다. 마치 내 얼굴에 점이 없으면 더는 거울이 내 얼굴의 점을 비추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침내 층간 소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이 자기 수용 작업을 할 때는 정말 힘들 것이다. 내 마음을 직면하기 두려운 에고의 저항이 굉장히 커지며, 층간 소음으로 인한 예민 지수가 전보다 훨씬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듭 반복하다 보면, ‘이 마음을 알아달라고 계속 신호를 보낸 거였구나’ 알게 되어 스스로 측은하기까지 하다. 결과적으로 층간 소음을 피해 한평생 도망치는 삶이 아닌, 어떤 외부의 소음이 들려도 자유로운 내가 되는 것이다. 소리를 소리로만 인식할 수 있는 삶,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 고통’을 먼저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물론, 모든 내면의 이슈가 있는 사람들이 층간 소음에 예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층간 소음에 예민한 사람들은 전부 내면의 이슈가 계속 자극받기에 불편한 것이다. 현실은 단지 거울일 뿐이고, 거울이 내가 억눌러둔 내면을 자꾸만 보여주니 자극받아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층간 소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 속 상황을 거울삼아 내면으로 들어가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면 이슈를 수용하여 자유를 거머쥘 수 있다. 답은 절대 외부에 없다. 자신에게 꼭 맞는 열쇠, 답은 자신의 내면에 있다. 이것이 영성의 핵심이다.
현실이 보여주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기 수용을 거듭한 사람 중, 변화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내 얼굴의 점이 사라지면 거울이 비춘 내 얼굴에 점이 사라지는 건 당연하듯이, 현실 창조에 예외란 없고 무의식을 비춤에 있어 오차도 없다.
층간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반드시 그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이 내 안의 무엇을 자극하고 있는지 잘 찾아서 끌어안아 보길, 그리하여 자유를 찾길 진심으로 두 손 모아 소망한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삶 속에서 마음이 잔잔하게 미소 짓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