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모두 보고 아는 ‘앎’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어느 날, 어떤 책에서 본 문구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 1달러짜리 화폐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그림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피라미드 꼭대기 부분에 그려져 있는 눈 하나. 나도 모르게 그 그림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을 비롯해 방 안 전체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시선을 처음으로 뚜렷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몸이 아니라 이 눈이 아닐까?’ 이 생각이 일어난 그때 나라는 정체성이 몸으로부터 쭈욱 늘어나 배면(등 뒤)의 시선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감각이었다.
이후 공부를 하면서 그 그림이 모든 것을 보는 눈을 뜻하는 “전시안(All Seeing Eye)”임을 알게 되었다. 프리메이슨의 상징이니 뭐니 하는 말도 있지만, 사실 전시안은 영성적 기원을 지닌다. 바로 “주시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뒤에서 묵묵히 주시하고 있는 이 앎의 느낌은 나의 모든 순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앎은 인격적인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주시자 명상수행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비인격적인 느낌으로 변해갔다. 마치 어딘가에 고정된 TV 중계 카메라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알아차림도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더는 진전이 없었다. 이후 수도원에 입회할 때에도 이 감각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나 자신을 몸이 아니라 보고 있는 의식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이는 나라는 정체성이 예전에는 몸뚱이에 동일시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그 동일시의 대상이 의식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여전히 명료하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학생 수사 교육을 받던 중 급성 뇌수막염에 걸렸다. 아팠을 때 바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4일이 지나서야 병원에 실려 갔기에 내 몸은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죽음의 순간에 비로소 배면의 앎은 벽을 깨고 각성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는 마치 깊은 잠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고, 편안한 휴식에서 깨어났을 때 몸은 이미 치유되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있을 때나 꿈을 꿀 때, 심지어는 깊은 잠을 잘 때도 항상 있었던 이가 ‘나라는 정체성’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일상을 주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주시자 의식이 깊어지지 않았던 초기에는 나는 주시자이지 대상이 아니라고 여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비이원성이 깨어난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생각, 감정, 느낌, 반응, 의도, 행위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 감정 등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 감정 등을 명확하게 대상화할 수 있는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생각, 감정 등에 떡이 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을 본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어야 가능하다. 생각을 비롯한 정신심리 작용이 일어날 때, 몸을 움직일 때, 사람들과 관계 맺는 모든 순간에 한 발짝 물러나 있다 보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게 된다.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이제 알아차리는 자를 알게 된다. 그것이 주시자의 시작이다. 꽃을 볼 때는 꽃뿐만 아니라 꽃을 보고 있는 나를 아는 앎이 있다.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타인과 언성을 높이며 감정싸움을 할 때도, 기쁘거나 슬플 때도 이 앎이 있다.
이 앎이 각성되기 이전에는 밥을 먹을 때 밥을 입에 열심히 퍼나르고 있는 이를 나라고 믿는다. 길을 걷는다면 걷고 있는 이 몸이 나고, 날이 더우면 ‘아 너무 덥다. 땀이 난다’라고 투정하는 이를 나라고 여긴다. 하지만 주시자가 각성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밥 먹는 이, 걷고 있는 이, 덥다고 투정하는 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아는 이다. 길을 걷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자’, 밥을 먹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자’, 땀 흘려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광경이,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항상 배면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앎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이전까지 철석같이 나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 몸과 마음마저도 말이다. 모두가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신심리 현상에 쉽게 끌려가 떡이 돼버리지 않는다. 이제껏 나를 괴롭히던 특정한 감정들에 고통받지 않게 된다. 감정 에너지가 강해 끌려가 버리더라도 쉽게 빠져나오거나 묘하게도 감정에 고통받는 개인이라는 상황을 아는 앎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사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혹시 누군가와 다툴 때 타인과 다투고 있는 내 모습과 내 감정을 마치 구경하듯 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구경하는 시선이 주시자다.
주시자가 자각되면 격렬하게 타오르던 감정의 불길이 많이 사그라듦을 경험할 수 있다. 주시자 의식의 초기에서 중반 단계까지는 이처럼 모든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느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 정도 되니까 삶이 살만했다. 예전처럼 격렬한 감정의 불길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으며 불안감이나 초조함을 느끼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오히려 가슴이 닫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감성 영역이 무뎌지며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초점을 얻었다면 내 현실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들과의 공감 능력을 잃게 되었다. 이런 상태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은 좋았지만 긍정적인 감정들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기간을, 감정적으로 볼 때 평온한 상태라고 오해했던 감성 좀비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이 마냥 축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인간 의식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체험할 때다. 영성 수련도 중요하지만 만약 그 수련으로 한 개인의 인간성의 특정한 부분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좀비 주시자는 사라졌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께 여쭙는다. “지금 누가 이 글을 읽고 있습니까?”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이가 필자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읽는 게 아닙니다. 글을 보면 그것이 나입니다.” 대상과 주체는 하나로서 같은 놈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작되는 생시 상태의 의식이 그대로 나다. 그 생시의 의식 안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다. 장을 볼 때 내 손에 들려있는 찌개용 두부가 나다.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사랑스러운 반려견이 나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기쁨이 나고, 누군가의 찌푸린 얼굴이 나고, 그의 근심 걱정이 나다. 이해할 수 있든 이해할 수 없든 그 사람 마음속의 한가득 차오른 아픔이 나다. 제대로 된 수박을 고를 줄 모르는 내게 사기를 쳐서 설익은 수박을 사게 한 과일가게 아저씨가 나며, 반대로 언젠가 거만하고 싸가지 없던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친구 녀석이 나다. 이 현실은 말 그대로 온통 ‘나의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그때그때 현실의 에피소드 안에서 각자의 역할에 맞게 이런저런 반응하는 역할은 할지라도, 그 어떤 수를 써도 세상을 미워할 수는 없다. 누군가 나를 공격할 때 그에 따른 반응은 취하겠지만 진짜로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이 상황 자체가 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비이원이 드러나는 순간 알게 된다. 그 누가 되더라도, 그 무엇이 되더라도, 그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게 나 자신이기 때문에.
어렸을 적 필자가 다니던 성당에서 “내 탓이오”라고 적힌 스티커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도대체 왜 내 탓인지 알 길이 없이 그저 그렇게 가슴을 두드리고 “내 탓이오” 하며 기도하면 좋다길래 따라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문장을 온전히 이해한다. 어째서 ‘내 탓’인지를 말이다.
진정한 주시자는 항상 대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를 아는 일상의 삶은, 세상이라는 낯선 무대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삶이 된다. 이를 통해 항상 하나를 확인한다.
“나는 내가 있음을 알고 있다.
I am that I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