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우리는 여러 감정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불편한 감정을 마주하기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닌 거 같아요. 하지만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기쁨과 고통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삶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가오고, 그것을 분별없이 허용할수록 우린 더 온전해집니다. 그런데 ‘받아들임, 내려놓음, 놓아버림’ 등 다양한 용어로 그것을 포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지만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게 단지 머리로 이해한 건지, 저항인지, 수용인지 참 미묘하고 헷갈립니다.
이 글은 저의 일상 속 찾아온 불편한 감정 중 그동안 싫어했던 ‘초라함, 창피함, 무력감, 버림받음, 화’ 등을 최대한 집중해 느껴보고, 있는 그대로 묘사해본 관찰 일기입니다. 무의식적 회피 반응을 어떻게 의식적 반응으로 바꾸었는지에 대한 작은 에피소드를 공유합니다.
#01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차갑고 남루한 기운이다. 문을 열어주기 싫다. 혼자 있는 시간에 은밀한 불청객이 찾아오기 시작한 건, 그 상을 받은 이후인 거 같다. 빛나는 표창이었지만, 영광의 시간은 끝났고 이제 내려올 일만 남았다는 하산 통지서 같았다. 불쾌한 건 피하는 게 상책이라며 습관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다 문득, 계속 찾아오는 게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날 통해 흐르는 우주의 기운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저항하는가. 알아채고 받아들이고 놓아버려라.’ 무수히 봤던 문구가 떠오른다.
먼저 생각의 스위치를 끈다. 온몸에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맡겨본다. 문을 열자, 불청객이 들어온다. 순식간에 공기의 음계가 장조에서 단조로 바뀐다. 불청객이 가슴 중앙 부근에 자리를 잡는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어떤 물리적인 기류가 가슴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불편함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때 감정과 나를 동일시하면 힘들어진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한걸음 떨어져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도대체 감정이 몸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어떤 울림을 내는지, 소설가가 하나의 장면을 포착해 묘사하듯 지금 흘러가는 마음을 가만히 지켜본다.
초라함, 그것은 거대한 마가린 빙하였다.
느낌에 접속하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몸통 전체가 하나의 빈 공간이라면 차가운 얼음물이 심장 높이까지 채워져 있고, 그곳에 꽁꽁 얼어붙은 마가린 빙하가 묵직하게 떠 있다. 영하 40도의 서늘함이다. 문득 왜 마가린일까 생각한다. 어릴 적, 친구네서 간장 한 스푼에 마가린을 비벼 먹던 단촐한 밥상이 떠오른다. ‘아, 나의 초라함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구나….’ 느낌이 머문 쇄골 아래 5cm 부분에 의식을 집중하자, 촛불이 나타나 얼음 같은 마가린을 녹이기 시작한다. 냉기 속에 부드러운 버터 향이 퍼지며 피아노 건반으로 ‘시’를 누른 듯한 스릿한 바람이 가슴을 통과한다. 계속 그 파동을 느낀다. 잠시 후 몸에서 작은 버블들이 터진다. 입을 벌리자 기포가 꺼억 빠져나간다.
…
3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 순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게 고요해진 자리, 불청객이 남긴 메모가 돌고래의 주파수처럼 전해져온다.
날 맞이해주어 고마워.
언제나 널 사랑해왔어. 안녕
― from the uninvited guest
#02
이렇게 헤매본 적이 있던가. 출판사와 책을 쓰기로 하고 거의 1년째인데, 아직도 제대로 쓴 게 없는 거 같다. 아무래도 이렇게 혼자 낑낑대는 건 아닌 거 같아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불쑥 만나자고 해본다. “네 작가님, 근데… 일단 진도를 좀 나가야, 만나서 할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요?” 편집자가 애써 매너 있게 난감함을 전한다. 기류가 순간 요상해진다. 전화를 끊자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공기가 엄습한다.
“창피해….”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한다. 반팔을 입고 있지만 몸통 아웃라인 주변은 온통 초겨울이다. 똑똑! 불청객이 문을 두드린다. 피하고 싶지만 이미 불가다. 도망가고 싶다. 이 느낌에서. 순간, 예전에 외워둔 만트라가 떠오른다! 비상약품 챙기듯 얼른 붙잡아 되뇌기 시작한다. ‘창피함을 느끼는 나를 사랑합니다. 창피함을 느끼는 나는 더욱더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여러 번 반복하자,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며 관찰자 모드로 전환할 여유가 생긴다. 그제야 문을 열어 불청객을 맞이한다.
창피함, 그것은 미끌거리는 살얼음이었다.
내 가슴 위로 얼음이 쫘르르 얼기 시작한다. 1~3mm 정도의 얇은 얼음이다. 아직 표면이 녹을랑 말랑 미끌거린다. 0도의 살얼음과 1도의 공기가 맞닿은 표면, 그곳이 섬세한 원자들의 운동으로 간질간질대는 느낌.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판 전체가 살짝 오그라든다. 곧 깨질 듯한 살얼음에 몸이 점점 수축된다. 그렇게 지금 느껴지는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느낀다. 가슴 앞판에서 시작된 불편한 울림이 조금씩 기화되어 식도 끝에 열기로 머물다 공기 중으로 빠져나간다.
...
몇 분이 지났을까.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몸이 스르르 풀린다. 바람에 실어, 앞으로 찾아올 불청객들에게 다짐 섞인 메모를 전해본다.
환대할게요. 함께 있어 줄게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바로 내가. 언제까지라도….
― from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