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서 마음(=무의식, 내면)이 중요한 이유는 외부 현실로 보이는 이 우주, 이 세상, 내 눈앞의 타인과 상황은 전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인 외부 현실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내면의 이슈가 그대로 펼쳐지는 각자만의 무의식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의 모든 마음의 시작과 끝은 전부, '사랑'이에요. [사랑이거나/사랑이 아닐까 봐 두렵거나] 이 두 가지에서 파생된 마음들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고민, 어떤 이슈를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시든 그 시작과 끝 역시 [사랑이거나/사랑이 아닐까 봐 두려움]이에요. 그래서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는 왜 사랑받고 싶어하고,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거예요.
1. 사랑이란
우리가 보통 ‘사랑’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로맨틱하고, 따뜻하고, 희생하는 모습 등이죠. 마음공부와 현실 창조 원리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나 자신에 대한 조건 없는 수용, 즉 분별 없는 수용을 뜻합니다. 내 존재가 받아들여진다고 느껴질 때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내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요.
혼란과 고통이 생기는 지점은, 어떤 나든 받아들여지는 수용이 곧 사랑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학습되지 않아서) [이런 나는 받아들여지고/이런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즉, [이런 나는 사랑받고/이런 나는 사랑받지 않아] 하고 분별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월하고, 아름답고,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고, 선한 나 등 받아들여질 만한 '나'는 좋아하고, 열등하고, 추하고, 무지하고, 게으르고, 책임감이 없고, 악한 나 등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한 '나'에게는 저항해요.
하지만 이 우주는 양극이 똑같은 에너지로 공존하고 있고, 공존하는 양극이 다 수용돼 하나가 되어야 우리의 원래 상태인, ‘비어 있는 0’이라는 우주의 균형이 맞춰져요. 그래서 내가 저항하는 것이, 수용되기 위해 현실로 창조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내가 저항할수록 괴롭고, 수용할수록 편해지는 거랍니다.
2. 우리는 왜 이토록 사랑받고 싶어하는 걸까?
마음에 대한 풀이는 어느 지점을 출발점으로 두는가에 따라서 조금씩 설명이 달라지긴 하지만, 결국 한 지점으로 모여요. 그래서 저는 그냥 다 얘기해볼게요. 억지로 받아들이실 필요는 전혀 없고요. 세 가지 중 이해되고 와닿는 것만 가져가셔도 무관합니다.
(1) 사랑받음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 부모님과 선사시대(유전자 각인)
부모님
내가 태아 상태일 때 내 목숨은 누구 손에 달려 있죠? 부모님, 특히 엄마입니다. 엄마가 밥을 굶든, 이상한 약을 먹든, 날 낳지 않기로 결정하든, 사고가 나든, 다치든, 공격당하든 엄마 배 속에 있는 나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어요. 이때 나는 이미 알아요. 내 생존권을 쥔 존재는 부모님이라는 걸요. 그리고 태어나서도 우리가 스스로 먹고살 수 있기 전까지 우리의 생존은 부모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즉,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건 내 존재의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고, 부모님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내 존재의 생존 확률이 떨어지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의 온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있어요.
우리는 첫 경험을 살아가는 세상에 지속적으로 투사해요. 자궁과 부모님은 우리의 첫 경험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는 부모님을 투사하게 되고, 모든 장소에는 자궁과 근원을 투사하게 됩니다. 머리로는 더 이상 부모님이 내 생존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이 의식화되지 않으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무의식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게 돼요.
그럼 우리는 왜 이토록 사랑받고 싶어할까요? 바로 ‘내 존재가 수용되어야 생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은, 내 존재가 수용되지 않으면(사랑받지 않으면) 죽음의 공포가 올라온다는 뜻이에요. 사랑받지 못하는 게 죽을 만큼 두렵다는 거예요.
선사시대(유전자 각인)
나는 부모님 무의식의 합이고, 부모님은 조부모님 무의식의 합이에요. 이런 식으로 쭉쭉 올라가면 결국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선사시대에서 내 존재가 수용되지 않아 무리에서 낙오되는 건, 곧 죽음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두려움'을 잘 감지해야 생존율이 높았어요(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두려움이 없으면 아무 동물이나 겁 없이 만지고, 아무 풀이나 뜯어 먹고, 위험한 곳에서 놀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안 피하면 사망 확률이 높죠. 이렇게 겁이 없던 사람들, 즉 두려움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작에 다 죽어서 자손을 남기지 못한 거고, 두려움을 잘 감지하고 느껴서 살아남은 조상들의 후손이 바로 우리예요. 그러니 우리는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말이죠.
따라서, 사랑받는다고 판단되는 건 생존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쁨,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올라옵니다. 반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생존 확률이 낮다고 판단하는 거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와요. 이렇게 사랑받지 못하는 두려움은 죽음의 공포에 맞닿아 있어요.
(2) 근원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무한한 빛, 사랑의 빛, 근원, 본래, 0, 무, 공에서 왔다. 이것이 원래 우리의 모습이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정말 많이 듣게 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전부 우리의 원래 상태, [모든 게 수용되어 하나 된 텅 빈 상태]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저는 이걸 줄여서 ‘텅 빈 0’이라고 할게요.
우리는 텅 빈 0에서 지구 체험을 위해, 육체를 입고 떨어져 나왔어요. 텅 빈 0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기로 하고 인간 체험을 하려고 왔지만, 우리의 온몸과 무의식에는 우리의 원래 상태인 텅 빈 0이 새겨져 있어요. 아무리 내가 다른 모습을 하고 살아간다고 해도 원래 내 모습이 가장 편한 법이거든요. 이 말은, 곧 우리는 [내 존재가 무조건 받아들여진, 수용된 상태]가 기본값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상태가 너무 편하고 당연한 거죠.
그런데 텅 빈 0에서 떨어져 나오면서부터 어떤 마음이 생길까요?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요. 이 말은 즉, [수용되고 싶어. 하나가 되고 싶어. 이게 원래 내 모습인데!] 이 뜻이에요. 그리고 자연히 반대의 마음도 생겨요. 바로 [수용되지 못할까 봐, 하나가 되지 못할까 봐 불안해. 불편해. 두려워. 수용되지 못하고 하나가 되지 못한 모습은 원래 내 모습이 아니란 말이야!]라는 마음이요. 내 원래 상태가 아니기에 발생하는 불편함이죠.
내 존재가 다 수용된 원래 상태를 원한다=사랑받고 싶다=본능
내 존재가 수용되지 못한 상태는 원래 내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불편하다=사랑받지 못하는 게 불편하다=본능
그리고 우리는 육체의 몸을 입은 차원에서 이 경험을 한 번 더 해요. 엄마랑 한 몸이었다가 탯줄을 끊고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이죠. 이때 근원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와 유사한 마음을 한 번 더 경험하는 거예요. '원래 내 상태인 하나 됨이 편안해. 떨어져 나오는 거 불편해! 두려워!'라고 느끼죠. 아기가 태어날 때 왜 우는지 아시겠죠? (의학적인 설명과 별개의 무의식 차원에서의 안내입니다.)
(3) 대물림된 카르마
'육체의 나'의 기준으로 보면 나에게는 내 조상들이 해소하지 못한 무의식이 그대로 대물림되어 있어요. 그 무의식을 다 찾아 헤맬 필요도 없이, 그저 '나'만 봐도 내 위에 어떤 무의식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죠. 대물림된 카르마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카르마가 있는지 보여줄 장치가 필요하고, 그게 '현실'이에요. 그리고 그 '현실'을 경험할 '육체'가 필요한 것이고요.
즉 우리가 그토록 사랑받고 싶어하고,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지 못하는 두려움과 아픔'이 윗대부터 해소되지 못하고 내게 와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 카르마를 육체를 벗어나서 볼까요? 전생/현생/환생/조상 카르마 전부 다 '허상'이기도 합니다. 근원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 자체가, '사랑인 그 자체로 수용된 원래 모습인 0'에서 나와서 내가 누구인지(사랑 그 자체)를 경험하기 위해 그 반대인 내가 아닌 모습으로(에고/사랑이 아닌 경험) 나타난 거예요. '사랑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려면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시공도, 펼쳐지는 현실도, 카르마도 전부 다 허상의 장치이자 이미지예요. 연극 무대, 드라마 세트장처럼요.
드라마 속의 공간과 시대가 전부 다 허구이지만 집중할 수 있듯이, 인생이라는 드라마를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인 셈이죠. 우리는 시간에 따라서 현상과 변화를 인식하고 있지만, 시공은 다 허상이라는 앎이 찾아오면 결국 전생/현생/환생/조상 카르마라는 것도 지구에서 펼쳐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눈앞에 나타난 모든 현실을 마음공부에서는 다른 말로 ‘빛의 연출, 홀로그램, 허상의 이미지’라고도 부르는 거예요. 모두 경험을 위한 하나의 이야기 장치, 도구일 뿐입니다.
육체의 나, 에고를 기준으로 두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해석이 바뀌기 때문에, 즉 연극배우를 '나'라고 두고 보는가, 연극 자체를 지켜보는 관객을 '나'라고 두고 보는가에 따라 해석이 바뀌기 때문에 뭐가 맞고 틀린 지 분류하는 건 별 의미가 없어요. 다 맞습니다. 1, 2, 3번 중 본인에게 와닿는 것만 참고하시면 됩니다. 무의식 정화를 통해서 어차피 스스로 알게 되는, 아니 여러분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에요. 잠깐 잊힌 기억이기에 내면 작업을 하시다 보면 결국 다시 기억하게 돼 있어요.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가며 걷듯이, 우리는 에고/참나/에고/참나 이렇게 살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가며 쉬듯이 에고/참나/에고/참나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죠. 감정에 휩쓸리고 현실이 허상인 걸 까먹고 있다가, 감정을 바라보고 수용하고 현실이 허상인 걸 눈치채고 가벼워졌다가. 이렇게 두 가지 모드로 사는 것이지 완벽한 참나의 상태로만 살 수는 없어요.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이상, 참나의 상태 역시도 에고의 상태를 배경으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알아차린다'라는 것 또한 '놓침'이 있기에 가능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무지하기만 한 사람은 없어요. 무지한 순간만 있어요. 깨닫기만 한 사람은 없어요. 깨달은 순간만 있어요. 얼마나 빨리 알아차리느냐, 얼마나 그런 순간이 많으냐, 그리고 유지되느냐의 차이일 뿐 에고로 존재하는 순간과 참나로 존재하는 순간이 번갈아가면서 지나갈 뿐이에요. 나중엔 거의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에고가 못나고 참나가 잘난 것도 아니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잘나고 못나고도 그저 인간의 기준이에요. 우리는 어차피 경험을 위해 온 것일 뿐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드라마에 속는 순간과 드라마임을 자각하는 순간을 반복해서 겪게 되는데, 만약 드라마에 푹 빠져 있기만 하다면 시나리오(현실)가 진짜인 줄 알 테니 너무 괴롭게 되는 것이고요. 이게 다 드라마인 걸 자각할수록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죠.
그러니 마음공부 하실 때도, 앎에 대한 집착이나 조급증, 참나/깨달은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갖고 목표를 두시는 것보다는, ‘알아차린 만큼 놓치고, 놓친 만큼 알아차리게 되겠거니...’ 하시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도달해야 되는 상태'라는 건 없어요. 환상이죠. 현실 창조의 원리를 잘 알아도, 무의식 정화를 아무리 잘해도, 결국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기에 고통과 즐거움은 반복되게 되어 있어요. 둘 다 받아들이는 힘이 커져서 쉽게 휩쓸리지 않게 되고, 잘 알아차릴 뿐이에요.